2016년 9월 5일 월요일

극도로 혼란한 이 시기에 항해 중의 북극성(polaris)처럼 영원한 길잡이로서의 논리 정연한 성경




"스스로를 구원하라"는 말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쓰지 않는 말이다. 그 누구도 스스로를 구원할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된 지가 어언 2천년 세월이 넘어 오늘의 시점에 다다라 있으므로 다시 말해 인간 구원은 이미 완료되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 인간의 반응 여하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고로 그런 의미에서는 "자신을 구원하라"는 말은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회개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스스로를 구원하라"는 의미가 된다. 회개는 어느 누가 대신해주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가 하지 않는 한 영구적으로 그는 구원될 수가 없음이다.

개인적인 회개가 처음부터 필요 없는 것이었다면 이미 모든 인류가 다 자동적으로 구원되어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 사람들이 회개하려 하지 않는 고로 회개를 강력히 촉구하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실존을 믿고 성경(어떤 이들은 성경 대신 굳이 "성서"라는 명칭을 고집하나 무의미한 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도 이 회개 없이는 첫째 죄 용서부터가 되지 않는다. 또 "믿는 자로서 회개하지 않는 자가 없다"는 말은 논리적으로는 타당성이 있을지 몰라도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함을 어찌 하랴.

구원, 믿음, 회개 등에 대한 올바른 지식부터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대로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건만 그 해당 성경 구절을 애매 모호하게 뒤틀어 억지 해석을 함으로써 전연 딴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회개는 말 그대로 지금까지의 행위를 뉘우치는 것으로서 다시는 과거의 행동을 하지 않음에 생명이 있는데도 정작 중요한 핵심이 되는 이 부분은 간과하고 다른 것으로는 무엇이든 말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를 구원함"이다. 세상 종교처럼 스스로의 어떤 도덕적 또는 종교적 행위에 의해 구원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이 이루어졌으니  이에 부응하는 개개인의 반응 여하를 묻기 때문이다. 집단적으로 일괄적으로 구원의 효험이 미쳐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결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개별적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미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써 완벽하게 완료되었음에도, 그러나 이를 근거로 자동적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믿어야 구원되는 것이니, 구원 얻는 믿음에는 바로 이 회개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향후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각자 스스로의 결단이 없이는 하나님의 완성된 구원이 일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죄를 지음으로써 인간이 죽음에 이른 것이므로 이는 당연하다. 구원된 자가 죄를 짓지 않음으로써 "자기 구원을 이룸"과 같이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 다짐이 있어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선물이 베풀어지는 것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왜 죄를 지음으로 죽음이 왔느냐 하면 죄는 자기와 남까지도 망치는 원흉이기 때문이다. 독극물을 먹었는데도 몸에 탈이 안날 리 없다. 고로 의사에게 가서 탈 난 몸을 고쳤을 때에는 그 독약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는 바로 그 뜻이다. 또 다시 먹을 바에야 누가 돈들이고 시간들여 병을 고치겠다고 처음부터 마음이나 먹겠는가.

이치가 그러함에도 이 영적인 병, 영적인 죽음의 치유에는 여전히 같은 독약을 먹어도 상관 없다는 식의 일부 신학적 견해가 난무하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일부쯤 "먹어도" 심각한 탈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식의 말이 어디 있는가. 일부라도 먹으면 맹독성을 발휘하는데 아예 먹지를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이렇게 단순 명료한 것이다. 어렵고 복잡하게 보이는 것은 이 세상 신(神)이요 왕(王)인 사탄이 사람의 마음을 성경이 복잡하고 어렵게 보이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죄 안짓고 어떻게 사냐?" 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선입관의 작용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몸에 해롭기 때문에 먹거나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 삶에 해롭기 때문에 치명적이기 때문에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살자니 어떻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냐 하는데 성경은 처음부터 살려고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살 곳, 살 만한 곳이 절대로 아님을 수차례 반복하여 경고하신 것이다. 살 만한 곳이고 또 살라고 하셨다면 살기 위해서 짓는 죄가 어느 정도 용납이 되고 묵과가 된다 하겠지만 성경에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구약 시대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이므로 사전 교육 차원에서 하나님 축복 받아 이 세상에서 형통하게 된다는 상징적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미 이루어져 그런 모든 상징적이고 그림자적인 의미가 불필요하게 된 마당에서는 실상 그대로를 얼마든지 알아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가감없이 현실 그대로를 인식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모든 내용으로 가르치신 것이고 제자들도 그 말씀대로 충실히 가르친 것이 신약의 모든 줄거리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제 둥지가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데 하나도 없다" 하신 그대로다. "인자(人子)"는 사람으로서의 대표성을 말씀하신 것으로 항상 당신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셨으니 곧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 오신 사실을 나타내신 것이다. 우리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려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당신 자신께 한한 말씀이 아니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 위해 하나님의 희생 양(모세 율법으로써 상징되어 내려 온 내용 그대로의)으로 오신 것 자체가 우리 인간이 모두 그런 죽음의 상태에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함이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요 이 세상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사실을 똑똑히 보지 않는 한 수박 겉 핥기로 믿는 것이지 절대로 새 생명으로 통하는 지름길이 될 수가 없다.

머리 둘 곳도 없는 인간인데 살려고 하다니,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다. 억지가 아니라면 인간은 물론 모든 피조물이 아담의 범죄 사건 이후로 지금까지 한결같은 해산의 고통( birth pangs) 중에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롬 8:22). 만물이 고통 중에 있는 것은 한 몸의 이치에서 그러하므로, 만물의 머리로서 인간과의 한 몸의 구조로 하나되어 계시는 하나님 친히 그 머리로서, 같은 고통 중에 계심을 안다면 우리가 감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로서 아직도 그 남은 고난 중에 계시므로 그 몸된 교회가 당연히 그 가운데 있음이 아닌가(행 9:4). 우리 위해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살려고 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산다는 것이 고난 받는 것이 아니다. 사탄은 삶에는 고난도 있을 수 있다고 그렇게 가르쳐 왔다. 고난은 죽음의 영역이지 산 자의 관할 아래 있지 않다. 모든 고난의 의미가 그러하다. 속지 말 것이다. 고난 고통이 있는 현재의 세상은 결단코 삶일 수가 없고 하나님 앞에서의 정상적인 생명의 향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성경적 결론을 무시하고서 당신은 어디에 설 것인가.

살기 위해 부득불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고 말씀대로 "머리 하나도 둘 곳이 없는" 세상에서 살려고 하는 것 자체도 어리석기만 한 것아 아니라 악한 것이니 이러한 말씀에 대한 정면 도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라 하셨음에도 감히 "살 수 있다"고 우기는 격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말씀에 대한 모든 불신이 범죄로 직결된다.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신다는 전제하에 자기 부인도 가능한데 그래서 머리를 중심으로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데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면 한 몸의 체제는 와해되고 그런 세계에서는 약육강식의 자아중심만이 판치고 결말로서의 공동 파멸은 필지인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함으로 빚어낸 현재의 인간 비극이 아닌가.

지금까지의 2천년 세월을 보내면서도 "기독교"는 이런 기본적인 지식에도 못미쳐 우왕좌왕해 왔다. 그동안 낮잠만 자고 있었던가. 대답은 간단하다. 사탄에게 한정도 없이 휘둘려 그런 것이고 그렇게 휘둘린 것은 성경을 통해 찾고 구하고 두드리지 않고 사람의 가르침이나 부지런히 찾는다며 돌아다니고 허송세월했기 때문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팥을 심었는데 콩 날 리가 없다. 두드리지 않는데도 열리는 수가 있다면 무엇 때문에 두드려야 열린다고 말씀하셨으랴. 그러므로 두드려라, 찾으라, 구하라ㅡ이 역시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이다. 로마 백부장 고넬료는 그동안 부지런히 구하고 찾고 두드린 것이다. 그 결과 마침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구원받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은혜로 믿음으로써 구원 얻는다는 의미를 마귀는 비틀어 참으로 요사한 것으로 인위적인 교리를 만들었으니. 때문에 성경이 강조하는 바 선과 의를 힘써 행함을 배격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선과 의를 행하지 않으면 어찌 되는가. 그 행함은 불법과 불의밖에 더 있는가. 자기 부인 아니면 자아중심 둘 중 하나다. 그 중간은 없다. 모으지 않는 자는 헤치는 자라고 말씀하신 그대로다(마 12:30). 사탄은 그 중간을 고집하여 지금까지 거짓으로 가르쳐 온 것이다. 그 중간이 있다고 거짓 주장하여 세상을 속여 온 자이다. 그러나 그 중간은 어디에도 없다고 증명해주는 것이 3위1체의 법칙이다. 그렇게 죄인도 아니고 그렇게 의를 행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하기만 해도 천국행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장담하는 것이 사탄의 교리다.

선과 의를 행함은 내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로 구원 받은 증거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산 자로서 사랑을 행하지 않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산 자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 특징인데 선과 의를 행하지 않으면 그러면 어떤 동기로 움직이는가. 자아중심 곧 자기를 위함밖에 어 있는가. 언제나 둘 중 하나다. 양자 택일뿐이지 그 중간은 없다고 항상 강조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속지 말라는 것이다. 구원을 위해 힘쓰든, 드러내놓고 악을 행하여 자기 욕심을 따르든 자아중심임에는 일반이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 모이기를 부지런히 하고 마지막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그러해야 하는 것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히 10:24) 위함이 그 한 가지 목적이 아닌가.

오늘날은 적 그리스도의 등장이 임박한 때로서(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모든 초능력이 총동원이 되는 때다. 예를 들어 중병이나 암 말기에 걸려 있어 소위 최첨단 치료를 통해서도 해결하지 못해 그 고통을 참지 못하는 중에 있다면 이를 회복시켜 주어 고통을 면하게 해준다면 평소에는 미신 정도로 취급하던 불교의 절에서 그런 초능력을 나타낸다고 알려져 있다면 그곳으로 달려가지 않을 자가 있을까. 소위 "기독교 교회"만 아니라 지금 절에서도 그런 초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그런 초능력에만 미혹되지 말라는 것임은 당연하다.

초능력이 아니라 인간 이성, 지성으로써 사물을 판단하고 단순히 초능력 자체에다 신적인 권위를 두지 말라는 경고다. 과거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했던 거룩한 천사들의 능력을 악령들도 이제는 제 때가 되어 십분 발휘하는 시기이기에 그렇다. 적 그리스도의 거짓 기적까지 보탠 모든 기적들이 그러하다. 거짓 기적까지 보탰으니 세상 사람의 눈에는 "성경의 하나님의 능력을 능가하는" 것이 될 것이요 따라서 자연적인 결론은 성경의 하나님보다 적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날 것인즉 전자보다 후자가 진짜 하나님이라는 결론에 쉬이 이르게 되도록 짜여져 나타내는 각본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도 악령들은 UFO를 통해 쉴 새 없이 초능력을 나타내고 있은즉 초능력 자체는 악령들도 얼마든지 행할 수 있으므로 거기에다 어떤 비중도 두지 말고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만 판단하여 진리를 찾을 때라는 것이다. 바로 이를 위하여 3위1체의 법칙, 3운법칙 등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필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시종일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을 수 없다, 무턱대고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에 납득시킬 수 없다고 믿고 성경을 파고들기 시작했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절대 허튼 소리를 할 리가 없으니 예컨대 "자기 부인"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기에 이를 강조하셨는지 그 이치를 캐기 위해 딴에는 찾고 구하고 두드린 것이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불합리한 데가 없다는 결론에 "이상 무"라는 신호를 세계 모든 독자에게 알리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이 그와 같이 진실된 기록임이 자체 증명이 된 이상 성경적 사실만 기준 삼아 모든 것을 판단하면 되는 것이며 성경보다 더한 기적이 등장하여 온 세상이 적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의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조금도 이에 동요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이미 그 진실성이 자체 증명된 성경에 그러한 모든 소위 "기적"과 "최첨단 (자연과학)지식"들이 상충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첨단 (자연)과학이라도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그 관찰과 결론에서 착오를 일으킬 수도 있고 더군다나 이 세상 신(神)이 고의적으로(악의적으로) 인간을 조종할 수 있다는 점을 착안한다면 성경과 상치되는 것을 얼마든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둘 중 하나를 택할 기로에서, 거짓으로도 초능력을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다고 성경이 미리 경고하고 있는 마당에 성경의 진실성이 자체 증명되고 있다는 믿음이 철석 같은데, 그런 초능력에 흔들릴 리가 만무하다. '판단 기준'이 이래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온갖 거짓과 속임수를 이로써 간단히 처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아무리 내 고통을 치유해 준다고 해도 진실과 진리(성경)에 위배되는 것에 나아가서 내 영혼을 팔 수는 없지 않은가. 영원한 멸망을 자초하는 일을 일시적인 고통 면하는 일과 맞바꾸는 그런 천하의 바보 짓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차라리 죽으면 죽는 것이지 고통을 받으면 받는 것이지 영생을 영멸과 맞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믿는 형제들일진대 그럴 경우 함께 모여 합심 기도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마귀의 등쌀에 전혀 능력을 나타내주시지 않는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이나 어제나 영원히 동일하신 것이다(히 13:8).

그러므로 "스스로를 구원하라"는 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인간 스스로 모든 일의 주역(主役)됨을 증명하는 것이니, 구원에 양면성과 동시성에서 그리고 사랑의 동시성과 양면성에서 그 주인, 주체로서의 역할을 다하라는 것이요, 절대로 남의 덕을 보자는 의타심, 의뢰심을 스스로 조장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하나님께 의뢰하고 의지하는 것도, 진리대로 이행하는 측면에서의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동시성과 양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기대는 그런 피동성, 소극적인 자세를 하나님은 배격하신다.


그것은 결단코 사랑일 수가 없는 까닭이다. 하나님은 한 몸 체제에서의 필수 불가결한 요건으로서의 사랑을 요구하심이니 이를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도 나타났듯이 사탄의 시험은 이 양면성에서 어느 한 쪽을 허물어도 그로서는 승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인 것은 당장 눈 앞에 나타나 있는 현실로서의 세상이므로,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 사랑하기 위해 행하는 일체의 것이 사탄에게 절하는 것 즉 자아중심을 따르는 것으로서 우리의 마땅한 경계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모든 잘못된 개념들을 때 늦기 전에 바로잡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매사 행하기를 힘써 이 악한 날에 대비할 것이다.  

2016년 9월 4일 일요일

진화론이 진실이라면 사랑 자체가 실종되고 삶은 살풍경이 된다는 사실을 인생들이여 뒤늦게나마 깨달아 스스로를 구원하라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빌 2:12)는 말과 같은 의미로서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 무결하게 다 이루어놓으셨으나 이를 수용하는 각자의 자세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무조건 안겨 주시는 것과는 의미상으로 차이가 현저하고 차원이 다르다. 다시 말해 왕이 잔치 자리에 손님이 없으므로 길거리에 나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끌어다가 잔치 자리에 앉게 했다는 말씀과 같다(마 22:9). 이 경우 사람들은 강제로 끌려오다시피 해서 왔고 단지 자리에 앉아주어 먹어주고 여흥을 즐겨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들로서는 아무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말 그대로 공짜다. 무료다. 그런데, 사람들이 들어올 때 왕궁에서는 예복을 준비해놓았으므로 이 예복을 입고 잔치 자리에 들어가 앉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최소한의 예절이고 이렇게 공짜로 환대를 해준 왕에게 대한 보답이 되는 것이었다.  

예복을 입는 것. 왕이 손님이 없기 때문에 즉 축하객이 없으므로 사람들을 그와 같이 불러다가 가득 채운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거기 나온 사람들은 축하객의 행세를 해야 하고 그 의미로 예복을 다 갖추어 입어야 하는 것. 강제로 입힌 것이 아니라 그 정도는 모두 알아서 하리라고 각자의 선택에 맡긴 것이다. 왕의 최소한의 요구로서 그 정도는 백번 마땅한 것. 거의 강제이다시피 사람들을 끌어왔지만 예복까지 강제로 입히는 것은 우스운 일이요 불필요한 것이니 사람마다 양식(良識)이 있기 때문. 

바로 이런 최소한의 양식을 요구하고 기대하시는 것이 방금 지적한 대로의 "스스로를 구원함"(딤전 4:16),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다. 비유하자면 음식을 차려놓았으면 각기 자기 앞에 놓인 숟가락, 젓가락을 동원하여 먹으면 되는 것이다. 누구든 일부러 젓가락으로 집어다가 입에 넣어주지 않는다. 최소한의 이런 양식에 따르는 행위까지 대신 해주는 것은, 바로 이런 멀쩡한 손 가진 사람의 입에 음식을 대신 넣어주는 것과 같다. 바로 이 의미가 예복 입는 것으로 비유된다. 강제로 예복을 입히면 강제로 입에 넣어주는 것이 된다. 그래서 예복만은 각자가 입도록 했는데ㅡ사태는 어떻게 발전했느냐 하면, 예복을 입지 않은 얌체족이 있었다는 것이다. 

왕이 그래서 그 점에 유의하여 혹시 그런 자가 있는가싶어 둘러보니 아니나다를까 한 사람이 의젓하게 자기 평상복 그대로 걸친 채 자리에 앉아 있기에 "이 사람아,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는 왜 들어왔지?" 하니 사실 할 말이 없는지라 결국 그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은 한 가지 이유,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그렇게 초대해준 왕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까지도 인색해한 지독한 자아중심의 이기주의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궁궐 밖으로 추방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때 "슬피 울며 이를 간다" 하셨는데 이는 멸망의 자리에 들어가는 자들을 상대로 곧잘 쓰신 표현이다. 즉 이러한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극히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면 의당히 그렇다고 보아야 할 이러한 양식의 결여가 다름아닌,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무결하게 이루어져 있으나 각자 자아중심을 버리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함으로 인해 많은 무리가, 절대 다수가 멸망에 들어감을 밝히 드러내신 것이다. 

하나님의 막중하신 사랑과 은혜를 받아 구원이 되어 있으면 최소한의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그런 정도의 마음 씀도 없다는 말인가. 바로 이 점에서 많은 사람이 탈락된다고 하셨으니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내가 하나님의 마음이라면, 내가 이 왕의 마음이라면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을 바랄 것인가 하는 최소한의 생각에까지도 미치지를 못하는 자아중심의 실상이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 자아중심은 살인을 비롯해 온갖 범죄의 뿌리요 온상인 것이니 이런 사람 천국에 보내보아도 제2, 제3의 사탄밖에 더 되지 않을 것이므로 일찌감치 이 세상에서 모두 도태시키시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렇게 악인들을 도태시키는 곳이다. 이런 악인들을 이와 같이 걸러내는 방법이 다름아닌 이 세상 잘 살아(주변 많은 사람의 고통 고난을 내몰라라 한 채) 한세월 잘 보내도록 하는 바로 이 함정에 있는 것. 소위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구원을 확신한다는 사람이든 아니든 불신자든 아니든 자아중심에서 자유 해방을 누리지 못하는 이는 모두 한 묶음으로 처리된다.    















STS336~340




























STS331~335


























STS326~330



























STS321~325


























2016년 9월 3일 토요일

당신은 하나님을 180도로 아주 거꾸로 보고 있다 (2)


당신은 하나님을 180도로 아주 거꾸로 보고 있다 (2)



당신은 하나님을 180도로 아주 거꾸로 보고 있다








죽음조차도 막중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니 그래서 자랑스럽게 "나는 날마다 죽노라!"ㅡSTS316~320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되니까
나의 죽음의 고난마저도(빌 1:21)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황금 덩어리구나 
새 생명이 나게 하고 무성하게 자라게 하는 막중한 가치의 거름(비료)이니까! 
이 거름이 없으면 작물(作物)이 비실비실하여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아주 단정해서 단호하게 자랑으로 말하는 사자(Lion)의 포효다
그래서 "의인은 사자와 같이 담대하다"(잠 28:1)
장정이라도 소년이라도 자빠지고 엎어지되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의 날개 침 같이  솟구쳐만 오른다(사 40:30,31)
한정도 없이 날아오르는 영원한 비상(飛翔)이다
























은혜와 사랑으로 진노와 저주가 상쇄된 것이 아니라 "진노 가운데"에서의 사랑이요 은혜ㅡSTS311~315





























해산의 수고를 의미하는 기도 없이 지식만으로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해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의 강력한 성령의 능력의 말씀 전파와 함께 다니엘 내쉬(Daniel Nash) 목사의 산고(産苦)의 기도가 19세기 중반 전미국을 대 영적 각성 운동으로 뒤흔들어 놓았는데 피니가 30대 초반임에 비해 내쉬는 50대로 그래서 별명이 "Father Nash"라는 애칭으로 불려졌지만 기도의 거장이었다. 집회 전에, 집회가 열리는 해당 지역의 민가에 먼저 가서 투숙하면서 혼자 아니면 기도의 동지와 더불어 장시간 기도로 씨름한 것이다. 그야말로 형언 못하는 기도의, 악령의 세력과의 사투였다. 장로교 목사지만 설교는 전적으로 피니가 맡고 그는 오직 기도에 전념한 것이다. 그는 또한 세계 지도를 펴놓고 모든 민족과 민생들을 어루만지듯이 하며 저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애써 부르짖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기도로써 10여년 여생을 바쳐 충성하다가 기도하는 중에 부르심을 받아 조용히 세상을 뜬 것이다. 그도 그 이전에는 강단에 서서 기도할 때 눈은 멀건히 뜬 채로 회중을 내려다 보면서 입만 놀리다가 "아멘" 하는 식이었다. 그런 정도였던 그가 피니가 회개할 당시 심한 안질을 앓기 시작하여 시력을 완전히 상실할 위기에 직면했는데, "하나님, 제게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전적으로 주님의 뜻을 좇아 여생을 바치겠습니다" 하여 병상에서 일어나자 곧장 기도자로서 완전히 삶을 바꾼 것이다. 인터넷 검색어 Father Nash, 또는 Daniel Nash로써 그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2016년 9월 2일 금요일

왜 끈질기게 응답되기까지 기도해야 하는가 그 이유와 목적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존재로서 그것이 우리 생명이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주시기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구하지 않는다. 구할 수도 없고. 우리는 우리를 위하지 않게 되어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니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것. 그 대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함이니까 응답하시기까지 한사코 구하게 되는 것. 이것이 얼마나 공정공평하고 떳떳한 일인가. 자기가 자기를 위해 구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나 아닌 상대를 위해서(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든 내 이웃의 행복과 안위를 위해서든) 기도하고 수고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것. 자기 구원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는 구원받은 사람을 그래서 자유인이라 하는 것이다.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 이는 곧 악령 사탄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행 26:18). 자유, 해방!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유 해방의 희소식인 것이다.  






아담의 범죄 이후 저주 아래 있으므로 새 생명 탄생시키려면 해산의 고통 통과가 필연ㅡSTS306~310


지금은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예비하는 시기ㅡ
나치 치하의 아우슈빗츠, 현재의 북한 수용소 못지 않게
적 그리스도는 인종 청소에 착수할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군인으로서 진군(進軍) 나팔은 울려져야 하는 것 


























2016년 9월 1일 목요일

우리 각자 믿음의 자가(自家) 진단법ㅡSTS305-2~4














(위의 NSO는 '모바일 보기'에서 확대해 볼 수 있음)




이다지도 간단명료한 복음인데도 신학자라야 해득할 수 있는 듯 농간질을 함은 사탄만이 할 수 있어ㅡSTS305-1



그래서 이로써도 사탄의 존재가 확인되고 증명되고 있는 것. 
DPA pix 같은 희귀한 비디오, 사진 등의 촬영에 의해서만,
NASA의 우연한 촬영에 의해 포착된 용(龍)의 형태로 인해, 
그 실존이 입증되는 것이 절대로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