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2일 목요일

639-5~645ㅡ"십자가의 원수로 행할" 수 있음을 경고하지 않는 오늘날 교회


















빈 손 들고 주님 앞에 오는 것뿐입니다.
왜냐면 나로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오직 죄뿐이니까.
그래서 구원을 은혜라 하고 선물이라 하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기쁘고 평안하고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 사실 단독으로만 보면 그러합니다.
더 분명히 말해 이것은 양면 중의 일면으로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내가 아니고(나는 할 수 없고) 하나님 단독으로 하신 하나님의 일이니까
나는 단지 그 하신(이루신) 일을 믿기만(수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바로 여기까지를 말한 것입니다. 
이 자체만 두고서는 아무 흠결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짝을 이루는 다른 한 면이 있는데
이를 무시하면 이상의 사실이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양면 중에 앞의 것만 말하고 그 나머지의 것을 무시하면 앞의 것마저도 부정되어버립니다. 
양면의 동전에서 한 면은 아무리 선명하게 박혀 있어도 
뒷면의 내용이 만일 부각되지 않는다면 동전으로서의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면 앞면과 뒷면이 다 함께 갖추어져야 다시 말해 둘이 하나됨으로써
동전으로서의 화폐 가치가 비로소 있는 까닭입니다.
양면으로서 갖출 것은 다 갖추어야 합니다. 
양면은 반드시 동시성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왼발 내디디면 반드시 오른발을 내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걷는 것이 가능합니다.
파동성과 입자성이 동시에 작동되어야 빛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그렇지 않으면 빛은 아예 존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바로 그 반대되는 것도 당연히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닙니다..
범죄가 없다가 범죄가 있게 됨으로써 이차적으로 생긴 것입니다. 

무조건하고 "새로 생긴다" 할 때는 반드시 양면성으로 발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3위1체 법칙의 지적입니다. 3운법칙도 아담 범죄 전에는 없다가 
아담 자신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인간이 죽은 자가 됨으로써 생긴 것이기에
당연히 이 3위1체 법칙의 지배 아래 존재하는 것이어서 그런 특이한 구조를 지닙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원리 자체도 
의당히 이 3위1체의 법칙을 따라 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질이 상반되는 것끼리의 하나로서의 양면성과 동시성을 예외없이 따릅니다. 

성질이 반대이니까 하나가 "나는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라면
나머지 하나는 그 '반대'이므로 당연히 "나는 나를 구원할 수 있다, 해야 한다"입니다.
빛의 파동성과 입자성은 성질이 정반대로서 딴판이다보니까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상보성 원리 즉 상반(相反)은 상보(相補)라는 
주장을 죽어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질이 정반대이지만 본질은 하나이니 즉 "내가 나 자신을 위할 수 없다"입니다.
단, 전자(구원받기 전의 상태)는 "내가 죄 중에서 죽었으니까 할 수 없다"입니다. 
아담이 자기의 범죄로 사망 신고를 받았기 때문에 나 역시 그에게서 난 자라
죽음 가운데에서 죽은 자로서 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나 자신의 그 동안의 범죄로(태어나자마자 태생적으로)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자기를 위한답시고 움직일 수 있습니까. 
일체의 행동이 정지된 상태가 죽음입니다.
행동하면 할수록 죽음뿐이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다음에는 그 후자(구원받은 상태)를 살펴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나는 산 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본질은 하나이니 즉 "나는 나를 위할 수 없다"입니다.
그러나 성질이 전자와는 정반대입니다. 즉 전자는 나 자신을 위함이었으나
(물론 그 나 자신을 위함이 불가능한 것이지 가능한 일이 아니었지만)
이제 후자에서는 살아나게 되어 산 자의 생명의 계율을 지키게 되어 있어
그 계명이 다름아닌 나를 위하지 않고 
나의 상대(머리 및 그 머리를 중심한 한 몸의 지체)를 위함입니다.

간추리면, 전자는 나를 위함이고 후자는 나의 상대를 위함입니다.
정반대가 되는 성질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둘의 본질이 동일한 것으로서 '나를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함'일진대
전자는 아무리 살아 있다손치더라도(사실은 죽어 있지만) 생명 아닌 죽음입니다.
다시 말해 범죄밖에 없으니까 욕심→범죄→사망(약 1:15)입니다.

또 다른 각도로 보아서도 전자는 생명의 법대로 자기를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하려 하나
죽은 자가 되어 그런 생명의 영역에 있지 않으므로 그 생명의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죽음에만 머물 뿐이므로 롬 7:24 탄식이 나오게 됩니다.

이와 같이 전자에서의 "나를 구원할 수 없다"와는 정반대로 
후자에서는 "나를 구원할 수 있다"로 바뀌는데 이는 앞의 설명처럼
나 자신을 위한다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본질로서의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다"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얼마든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실질적으로 나를 위하지 않게 되니까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됩니다.
전자에서는 이 생영의 일이 불가능했으나 후자에서는 가능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가능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한량 없으신 사랑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은혜가 크시더라도 이 원인을 따라 나 자신 스스로 결과를 맺지 못하면
원인 무효가 되는데 그래서 나 스스로 믿어야 그래서 사랑 가운데 행하기로 해야 
인과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는 것이요, 믿은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도에 내 스스로 결과되기를 포기할 때 역시 원인 무효가 됩니다.   

내가 마음을 잘못 먹어 아담이나 악령들처럼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므로 그래서 아담이나 사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두렵고 떨림으로"(빌 2:12) "조심한다"(고전 10:12)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전자만 강조하고 후자는 빼버렸습니다.
이제까지의 설명이 사랑을 강조한 것인데 그런 일방적인 가르침(인위적 교리)은
자연스럽게 이 사랑을 외면한 것이 되어 
바로 이 사랑 없음이 죄요 악, 불법, 불의인 것이니 
이로써 하나님의 진노는 거두어질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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