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9일 월요일

마틴 루터도 이단인가ㅡSTS123






위에서 요한 사도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직언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으니 죄인 중에 내가 괴수이다"(딤전 1:15) 했고 동시에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전 15:34), "은혜 아래 있다고 죄를 짓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롬 6:15)고 했으니 모순된 말이 아니냐 하겠지만, 모순되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잘못 알아듣는 탓이다. 한 술 더 떠 바울 사도는 "죄의 몸이 와해되었다, 파괴되었다"고 했다(6:6). 요한과 똑같은 논조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죄(짓기)를 그쳤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 분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한 말들이기 때문이다(고후 5:20).

*여기서 "대신한다"는 말을 다시 잠깐 생각해보면, 영역(KJV, ASV)에서 보듯이 on behalf of, in one's stead 등으로 확실히 표현해두고 있다. 아래의 구절(5:21) 우리말 번역 "우리를 대신하여"는 "for us"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언어 권에서나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나 이를 "대신한다"는 의미로 거의 일치하게 뜻 풀이를 해놓고 있으니 이는 번역이 아니라 개인적 "신학"을 피력하는 것뿐이다. 단순한 "우리를 위해서"라는 말일 뿐인데 이렇게 억지 해석을 갖다 붙이고 있으니 어찌 제대로 된 성경 이해라 할 것인가.

마틴 루터도 틀렸다, 칼빈도 글렀다 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다. 다시 말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 운운은 칼빈식, 루터식 해석인 것이다. 소위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전제하에서 루터와 칼빈의 "신학"(성경 해석이 아닌, 공통된 개인적 견해)이 나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 아니고 나를 제외한 그리스도만이 나를 대신하여 홀로 죽으셨으니 "나는 여전히 죄인"이라는 논리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현재 죽어 있는' 자가 어찌 다시 죄와 노닥거리는가. 죄는 자기 욕심에서 출발하는(약 1:15) 자아중심이 뿌리이지 않은가. 자기가 죽었는데 무슨 자기 욕심이 있는가.

당신이 입에 달고 이야기하듯 하는 죠지 뮬러, 헛슨 테일러, 찰즈 피니는 어떤 "신학"이냐고 물으려 하는가. 필자는 신학을 말하지 않는다. 학문적 접근이므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다. 접근 방식에 따라 결론이 달리 나오기 때문에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도 생기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성경을 논함에서 절대로 신학을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런 학문적 접근 방식을 배제, 배척하는 것이다. 학문은 결론을 내려는 접근 방식을 말함이다. 우리가 알려는 진리는 이미 결론이 되어 성경에 나와 있는 것으로서 절대적이다. 그것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 성경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말로 나타내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무엇이든 언어로 표현함에는 절대적 정직성이 요구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온다"는 말에는 온다는 의미 외에 다른 것이 절대로 끼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럴 경우 말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말을 아무리 강조해도 아무 짝에도 소용 없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일을 인간에게 알리는 일에서랴. 성경이 처음부터 누구나 읽기 쉬운 가장 간결한 형태로 기술된 것이 그 때문이다. 필자도 소위 유식한 말, 전문 용어는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가장 쉽고 평범한 말을 골라 쓰려고 오래 전부터 작정한 터이지만 그것이 잘되지 않아 언제나 불만이다. 성경은 만인 상대이므로 그 만인 중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게 마련이다. 가장 직설적으로 알아 듣기 쉽도록 말하려고 기술된(성령의 인도로) 책이 성경이다. 고로 성경대로 읽으면, 알아들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다. 그 말씀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양자 택일만 요구되는 것뿐이다.

그 선택은 자유다. 절대 자유가 보장되므로 아담의 범죄가 가능했고 영물 중에 사탄과 같은 악령들도 생긴 것이다. 영물들은 인간(아담)처럼 단 둘(남자와 여자)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둘 다 죄에 빠짐과 같은 경우를 빚어내지 않고 당초부터 "천천 만만"(계 5:11)이므로 당연히 죄 짓지 않고 "거룩한 천사"로서의 품위를 그대로 유지한 무리들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똑같은 자유 의지가 보장되어 있어 역시 그런 결과 즉 하나는 악인으로 풀리고 다른 하나는 거룩함을 유지하는 쪽으로 갈라질 수 있어 성경이 그 위험을 미리 알리고 경고하는 일이거늘 그것이 그리도 알아듣기에 어렵다는 말인가. 아무리 세상 인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악령 사탄이 이 세상 신이요 왕(지배자)이라 해도 인간의 이 자주적인 선택권에는 감히 얼씬도 못하고 손도 못댄다. 고로 악령들의 간섭, 강제도 '인간의 동조 아래 되어지는 조종'이다.

찰즈 피니가, 죠지 뮬러 또는 헛슨 테일러, 진젠도르프  백작(모라비아 교회 부흥의 중심 인물)이 무슨 신학적 견해를 유지했는가 그것을 문제로 삼으려는 것은 무의미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했는지 여부만 알면 되는 것이다. 지식이야 짧을 수도 있고 경험이야 부족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이 모든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심에 대한 대답인 것이다. "사람아, 주님께서 선한 것("좋은 것이 좋다"는 그 좋은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으니 곧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公義, to do justly)를 행하며 인자(仁慈, mercy, kindness)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to walk with God,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는 언행)이 아니냐"(미 6:8), 이 말씀을 수용하는지 여부를 물으시는 것이다.

칼빈이 그렇게 말했고 행동했고 루터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것이 비성경적이라고 지적하는 것뿐이다. 방금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요건에 대하여 그들이 과연 적합했는지 여부는 그들 개인의 문제다. "분쟁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는 바울의 경고를 우리는 소중히 여겨 귀 담아 들을 일이다. "나는 바울파, 나는 아볼로파, 나는 베드로파, 나는 그리스도파"라고 각자 주장대로 나간다면, "그리스도께서 어찌 분리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책망의 대상만 될 것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시고 보내심은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한 대로, "선생된 자들이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는 야고보의 경고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함과 같이 무릇 가르치는 자의 위치에 섰다고 여기는 자는 모름지기 말을 삼가고 조심할 일이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는데 그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다" 한 것은 "과거 내가 죄인의 괴수였으나(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고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까지 했으니) 구원을 받은 후로는 죄인이 아니다"라는 뜻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말을 억지로 만들어내어 자기의 신학적 교리에 꿰어 맞추려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이 뜻에 대해 애매 모호하다고 지적할 이는 없다. "구원하시려고"ㅡ이 목적에 부합하여 대응되는 문구가 "죄인의 구원"인 것이다. 구원의 대상이 "죄인"이지 "의인"일 수가 없다. "의를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는" 까닭이다.

그리스도께서 "믿어 영생하라" 하시지 않고 "회개하라"(막 1:15) 명령하신 것은(행 17:30), 죄를 회개함으로써 즉 과거의 죄를 뉘우침으로써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즉 의인이 되라는 뜻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의인 아니면 죄인이요 죄인 아니면 의인이니 그 중간은 없다. 의인이 될 수 있는 길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어놓으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마지막 심판도 가능해졌다는 것이 바울의 전도의 요점이다(:31). 마지막 심판의 의미를 강조하여 바울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니 우리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5:10,11)고 한 것이다. 따라서 그 결론을 말하되, "참고 선을 행하면 영생"(롬 2:7)이라 했다. 이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요 5:29)에 해당된다는 주님의 말씀 선포에 따름이다.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고"(롬 3:10)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다"(:12)고 거듭거듭 강조한 결론과 모순된다고 다시 이의를 제기하려는가. 그런즉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이다. 오신 것이다.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또 이제 다시는 죄를 짓는 죄인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믿으라 하시지 않고 회개하라는 말씀을 절대 명령으로 주신 것이다. 성경은 바울의 입을 통해서나 요한의 입을 통해서나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 죄를 짓지 말라고 여러 번 강조해서 역설하고 있다. 요한일서 첫머리에서부터 나오는 죄 지적은 형제 사랑의 결여를 말함이다. 우리는 이것을 죄로도 인식하지 않았다.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을 요한 사도는 통렬히 지적하고 책망한 것이다. 죄(형제 사랑이 없는 것)를 죄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이 점을 지적하여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다"(요일 1:8) 한 것이다. 요한의 한결같은 강조는 이내 곧 나온다. 즉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2:1)이라 했고 그러나 연속해서 "누가 죄를 지으면"이 나오나, 이는 모순된 말의 연속 연발이 아니라 이제까지 죄로 여기지 않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음"을 지적함이다.

그리고 이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는 그 즉시로 연달아 나온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 것이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했고 그를 알지도 못한다"(3:6),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그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다"(: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않는다"(5:18). 그런데 루터가 무엇인데 감히 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게 말하는가. 어디까지나 개인 사정이요 경우이다. 덩달아 따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 경고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고후 5:11) 자가 감히 죄를 지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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