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30일 화요일

사탄은 '산 자'로서의 특징인 "힘씀"을 제거해버렸으니 그럼 '죽은 자'일 수밖에ㅡSTS161~165























믿기만 하면 되는 은혜로써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ㅡ고로 구원을 받아 챙겼으니 이제는 태평이고 안심이다, 더 이상 구원에 대해 초조해할 것 없고 영원 멸망에 대한 공포가 제거되었으니 얼마나 좋으냐ㅡ그래서 은혜 너무 감사하고 마음의 평안이 넘쳐난다. 좋다. 누가 자기 구원에 대해 힘쓰고 애쓰라 했던가. 사랑으로 구원 받았으니 머리되시는 마지막 아담을 나도 사랑하여 그가 본을 보이신 대로 나의 신명을 다 바쳐 그 뜻을 행하라고 성경은 엄명하지 않는가.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신 것이다. 그리고서 성령을 받으라 하셨으니 성령을 받음으로써 즉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구원인데 바로 이 구원받음의 의미를 이와 같이 명시하신 것이다. 

어찌하여 이미 천국에 와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가. 사람들을 구원하시되 지금은 <그 몸된 교회를 통하여> 구원하시는 시대다. 바로 그 사람들 구원해내는 일을 계속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요 나는 "그 고난을 내 몸에 채운다"고 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 구원하라고 즉 열매 맺으라고 구원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열매를 맺지 않고,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3위1체 원리의 상보성(相補性-닐스 보어가 발견해낸, 서로가 서로를 보완함으로써 생존하는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의 진리를 따르지 않고 마치 자기 혼자 세상에 있는 것처럼 자아중심으로 일관하면서 구원받았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하나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는가. 머리와 몸 관계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으면 몸은 머리의 지시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 생명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자 그대로인 것이다. 산 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 성경에 그토록 밝혀 말씀하신 구원의 의미를 당신은 크게 오해하고 지금까지 자신을 속여 온 것이다. 

어찌하여 자기가 자기를 위해 사는 자아중심 그대로 있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사랑은 나를 사랑하고 위하는 것은 결코 나 자신일 수 없고 나와의 머리와 몸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하나님이심을 확증해주는 의미이다. 그것이 실증(實證)된 의미이다. 따라서 나는 더 다시는 과거 아무 것도 모르던 때처럼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상대이신 나의 머리가 되시는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고 그리고 그 지시를 따라 나의 머리께서 나와 똑같이 위하고 계시는 내 이웃을 위하여 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한 몸의 이치에서 바로 그것이 내가 나 자신을 위함이다. 왜냐면 머리께서 나를 위하시고 머리의 지시를 받들어 내 이웃이 모두 자기네를 위하지 않고 자기 이웃인 나를 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 나를 위함이니, 내가 나 혼자 나를 위한다면 내가 하나이니 단 1로써만 위해지는 것이지만 내 이웃이 그와 같이 나를 위할 때에는 내 이웃이 백이면 100으로 위해지고 억(億)이라면 억배로 위해지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함에서 이보다 더 이상적인 방법이 어디 있는가!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당장은 내가 위해지지 않는다고 근시안적이 되어 우선 위해지는 것이 확실한 나 자신을 위함으로써 죄인되고 죽음에 붙들려 있었던 것이 과거 사탄에게 종으로 있어 그의 모든 거짓과 속임수에 휘말려 있던 실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 진리를 깨달았는데 다시 이전 그 노예 상태로 되돌아가려는가. 성경이 이를 경고하여 위로의 말씀보다 이 경고의 말씀이 더 많은 것이 이 까닭이다. 사랑은 마음에 있은즉 이 마음이 시험을 받아 언제든지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시록에서도 경고하시기를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기억하고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네 자리에서 옯기리라" 하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그렇게 변할 수 있는 유동적이라 해도 이 세상에서 변할 사람은 다 그 변함을 실증한 나머지로서의 이 세상의 시험 무대로서의 의미인 고로 모든 것이 증명이 되었은즉 천국에서는 더 이상 이런 시험 무대가 펼쳐지지 않는다. 오직 이 세상뿐이다. 그러므로 이 한 세상 잘 이겨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자를 "이기는 자"로 표현하신 것이다. 구원의 단계에서 이기는 단계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아담이나 영물들이나 애초의 그 창조된 뜻을 저버리고 스스로 자멸의 길로 접어든 것처럼 하지 말라는 뜻이다. 

누가 그들을 가리켜 창조의 제2단계에서 탈락했다고 하는가. 이미 창조는 끝난 것이다. 우리의 구원도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끝 마무리에서 그들은 탈락된 것이다. 우리 역시 새 창조는 끝났으나 우리 스스로에게 부과되어 있는 우리 책무를 다하지 않음으로써 아담처럼 악령들처럼 자살행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왜냐ㅡ생명은 사랑에 있고 사랑은 말 그대로 자유, 자유 의지의 향방이 최종 관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써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 마음에서 나기 때문이다"(잠 4:23) 하고 솔로몬은 경고하지 않았던가. 

놀라운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를 받았기 때문에 말은 그렇게 해놓고서는, 솔로몬 자신은 힘써 이 마음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말년에 크고 두려운 범죄를 일삼았으니, 자기의 이방인 처첩들을 위해 이방신을 섬길 수 있는 조처를 취해주었던 하나님께 대한 큰 배반 행위를 감행했던 것이다. 성경에 그가 이를 "회개했다"는 기록이 없으니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의 행방을 알 길이 없다. 멸망했을까. 기록이 없다. 다윗도 범죄했을 때는 회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솔로몬만은 없으니 누가 그에 대한 낙관론을 피력하리요.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이다(빌 2:12). 솔로몬의 어록이 성경에 있음은 그의 지혜로운 말들이 하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 단지 이 이유 때문이다. 그 개인적 말로는 어찌 되었는지, 이 자체가 또 하나의 크나큰 교훈(경고)으로 남아 있다. 한 때는 은혜를 입었으나 마지막 마무리가 그 자신으로 말미암아 망가졌다는 것이니, 이 실례(實例)야 아담도 그렇고 현재의 악령들도 그 산 증거가 되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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