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5일 월요일

극도로 혼란한 이 시기에 항해 중의 북극성(polaris)처럼 영원한 길잡이로서의 논리 정연한 성경




"스스로를 구원하라"는 말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쓰지 않는 말이다. 그 누구도 스스로를 구원할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된 지가 어언 2천년 세월이 넘어 오늘의 시점에 다다라 있으므로 다시 말해 인간 구원은 이미 완료되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 인간의 반응 여하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고로 그런 의미에서는 "자신을 구원하라"는 말은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회개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스스로를 구원하라"는 의미가 된다. 회개는 어느 누가 대신해주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가 하지 않는 한 영구적으로 그는 구원될 수가 없음이다.

개인적인 회개가 처음부터 필요 없는 것이었다면 이미 모든 인류가 다 자동적으로 구원되어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 사람들이 회개하려 하지 않는 고로 회개를 강력히 촉구하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실존을 믿고 성경(어떤 이들은 성경 대신 굳이 "성서"라는 명칭을 고집하나 무의미한 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도 이 회개 없이는 첫째 죄 용서부터가 되지 않는다. 또 "믿는 자로서 회개하지 않는 자가 없다"는 말은 논리적으로는 타당성이 있을지 몰라도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함을 어찌 하랴.

구원, 믿음, 회개 등에 대한 올바른 지식부터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대로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건만 그 해당 성경 구절을 애매 모호하게 뒤틀어 억지 해석을 함으로써 전연 딴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회개는 말 그대로 지금까지의 행위를 뉘우치는 것으로서 다시는 과거의 행동을 하지 않음에 생명이 있는데도 정작 중요한 핵심이 되는 이 부분은 간과하고 다른 것으로는 무엇이든 말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를 구원함"이다. 세상 종교처럼 스스로의 어떤 도덕적 또는 종교적 행위에 의해 구원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이 이루어졌으니  이에 부응하는 개개인의 반응 여하를 묻기 때문이다. 집단적으로 일괄적으로 구원의 효험이 미쳐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결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개별적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미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써 완벽하게 완료되었음에도, 그러나 이를 근거로 자동적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믿어야 구원되는 것이니, 구원 얻는 믿음에는 바로 이 회개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향후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각자 스스로의 결단이 없이는 하나님의 완성된 구원이 일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죄를 지음으로써 인간이 죽음에 이른 것이므로 이는 당연하다. 구원된 자가 죄를 짓지 않음으로써 "자기 구원을 이룸"과 같이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 다짐이 있어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선물이 베풀어지는 것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왜 죄를 지음으로 죽음이 왔느냐 하면 죄는 자기와 남까지도 망치는 원흉이기 때문이다. 독극물을 먹었는데도 몸에 탈이 안날 리 없다. 고로 의사에게 가서 탈 난 몸을 고쳤을 때에는 그 독약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는 바로 그 뜻이다. 또 다시 먹을 바에야 누가 돈들이고 시간들여 병을 고치겠다고 처음부터 마음이나 먹겠는가.

이치가 그러함에도 이 영적인 병, 영적인 죽음의 치유에는 여전히 같은 독약을 먹어도 상관 없다는 식의 일부 신학적 견해가 난무하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일부쯤 "먹어도" 심각한 탈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식의 말이 어디 있는가. 일부라도 먹으면 맹독성을 발휘하는데 아예 먹지를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이렇게 단순 명료한 것이다. 어렵고 복잡하게 보이는 것은 이 세상 신(神)이요 왕(王)인 사탄이 사람의 마음을 성경이 복잡하고 어렵게 보이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죄 안짓고 어떻게 사냐?" 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선입관의 작용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몸에 해롭기 때문에 먹거나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 삶에 해롭기 때문에 치명적이기 때문에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살자니 어떻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냐 하는데 성경은 처음부터 살려고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살 곳, 살 만한 곳이 절대로 아님을 수차례 반복하여 경고하신 것이다. 살 만한 곳이고 또 살라고 하셨다면 살기 위해서 짓는 죄가 어느 정도 용납이 되고 묵과가 된다 하겠지만 성경에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구약 시대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이므로 사전 교육 차원에서 하나님 축복 받아 이 세상에서 형통하게 된다는 상징적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미 이루어져 그런 모든 상징적이고 그림자적인 의미가 불필요하게 된 마당에서는 실상 그대로를 얼마든지 알아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가감없이 현실 그대로를 인식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모든 내용으로 가르치신 것이고 제자들도 그 말씀대로 충실히 가르친 것이 신약의 모든 줄거리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제 둥지가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데 하나도 없다" 하신 그대로다. "인자(人子)"는 사람으로서의 대표성을 말씀하신 것으로 항상 당신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셨으니 곧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 오신 사실을 나타내신 것이다. 우리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려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당신 자신께 한한 말씀이 아니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 위해 하나님의 희생 양(모세 율법으로써 상징되어 내려 온 내용 그대로의)으로 오신 것 자체가 우리 인간이 모두 그런 죽음의 상태에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함이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요 이 세상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사실을 똑똑히 보지 않는 한 수박 겉 핥기로 믿는 것이지 절대로 새 생명으로 통하는 지름길이 될 수가 없다.

머리 둘 곳도 없는 인간인데 살려고 하다니,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다. 억지가 아니라면 인간은 물론 모든 피조물이 아담의 범죄 사건 이후로 지금까지 한결같은 해산의 고통( birth pangs) 중에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롬 8:22). 만물이 고통 중에 있는 것은 한 몸의 이치에서 그러하므로, 만물의 머리로서 인간과의 한 몸의 구조로 하나되어 계시는 하나님 친히 그 머리로서, 같은 고통 중에 계심을 안다면 우리가 감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로서 아직도 그 남은 고난 중에 계시므로 그 몸된 교회가 당연히 그 가운데 있음이 아닌가(행 9:4). 우리 위해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살려고 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산다는 것이 고난 받는 것이 아니다. 사탄은 삶에는 고난도 있을 수 있다고 그렇게 가르쳐 왔다. 고난은 죽음의 영역이지 산 자의 관할 아래 있지 않다. 모든 고난의 의미가 그러하다. 속지 말 것이다. 고난 고통이 있는 현재의 세상은 결단코 삶일 수가 없고 하나님 앞에서의 정상적인 생명의 향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성경적 결론을 무시하고서 당신은 어디에 설 것인가.

살기 위해 부득불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고 말씀대로 "머리 하나도 둘 곳이 없는" 세상에서 살려고 하는 것 자체도 어리석기만 한 것아 아니라 악한 것이니 이러한 말씀에 대한 정면 도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라 하셨음에도 감히 "살 수 있다"고 우기는 격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말씀에 대한 모든 불신이 범죄로 직결된다.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신다는 전제하에 자기 부인도 가능한데 그래서 머리를 중심으로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데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면 한 몸의 체제는 와해되고 그런 세계에서는 약육강식의 자아중심만이 판치고 결말로서의 공동 파멸은 필지인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함으로 빚어낸 현재의 인간 비극이 아닌가.

지금까지의 2천년 세월을 보내면서도 "기독교"는 이런 기본적인 지식에도 못미쳐 우왕좌왕해 왔다. 그동안 낮잠만 자고 있었던가. 대답은 간단하다. 사탄에게 한정도 없이 휘둘려 그런 것이고 그렇게 휘둘린 것은 성경을 통해 찾고 구하고 두드리지 않고 사람의 가르침이나 부지런히 찾는다며 돌아다니고 허송세월했기 때문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팥을 심었는데 콩 날 리가 없다. 두드리지 않는데도 열리는 수가 있다면 무엇 때문에 두드려야 열린다고 말씀하셨으랴. 그러므로 두드려라, 찾으라, 구하라ㅡ이 역시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이다. 로마 백부장 고넬료는 그동안 부지런히 구하고 찾고 두드린 것이다. 그 결과 마침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구원받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은혜로 믿음으로써 구원 얻는다는 의미를 마귀는 비틀어 참으로 요사한 것으로 인위적인 교리를 만들었으니. 때문에 성경이 강조하는 바 선과 의를 힘써 행함을 배격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선과 의를 행하지 않으면 어찌 되는가. 그 행함은 불법과 불의밖에 더 있는가. 자기 부인 아니면 자아중심 둘 중 하나다. 그 중간은 없다. 모으지 않는 자는 헤치는 자라고 말씀하신 그대로다(마 12:30). 사탄은 그 중간을 고집하여 지금까지 거짓으로 가르쳐 온 것이다. 그 중간이 있다고 거짓 주장하여 세상을 속여 온 자이다. 그러나 그 중간은 어디에도 없다고 증명해주는 것이 3위1체의 법칙이다. 그렇게 죄인도 아니고 그렇게 의를 행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하기만 해도 천국행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장담하는 것이 사탄의 교리다.

선과 의를 행함은 내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로 구원 받은 증거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산 자로서 사랑을 행하지 않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산 자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 특징인데 선과 의를 행하지 않으면 그러면 어떤 동기로 움직이는가. 자아중심 곧 자기를 위함밖에 어 있는가. 언제나 둘 중 하나다. 양자 택일뿐이지 그 중간은 없다고 항상 강조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속지 말라는 것이다. 구원을 위해 힘쓰든, 드러내놓고 악을 행하여 자기 욕심을 따르든 자아중심임에는 일반이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 모이기를 부지런히 하고 마지막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그러해야 하는 것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히 10:24) 위함이 그 한 가지 목적이 아닌가.

오늘날은 적 그리스도의 등장이 임박한 때로서(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모든 초능력이 총동원이 되는 때다. 예를 들어 중병이나 암 말기에 걸려 있어 소위 최첨단 치료를 통해서도 해결하지 못해 그 고통을 참지 못하는 중에 있다면 이를 회복시켜 주어 고통을 면하게 해준다면 평소에는 미신 정도로 취급하던 불교의 절에서 그런 초능력을 나타낸다고 알려져 있다면 그곳으로 달려가지 않을 자가 있을까. 소위 "기독교 교회"만 아니라 지금 절에서도 그런 초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그런 초능력에만 미혹되지 말라는 것임은 당연하다.

초능력이 아니라 인간 이성, 지성으로써 사물을 판단하고 단순히 초능력 자체에다 신적인 권위를 두지 말라는 경고다. 과거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했던 거룩한 천사들의 능력을 악령들도 이제는 제 때가 되어 십분 발휘하는 시기이기에 그렇다. 적 그리스도의 거짓 기적까지 보탠 모든 기적들이 그러하다. 거짓 기적까지 보탰으니 세상 사람의 눈에는 "성경의 하나님의 능력을 능가하는" 것이 될 것이요 따라서 자연적인 결론은 성경의 하나님보다 적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날 것인즉 전자보다 후자가 진짜 하나님이라는 결론에 쉬이 이르게 되도록 짜여져 나타내는 각본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도 악령들은 UFO를 통해 쉴 새 없이 초능력을 나타내고 있은즉 초능력 자체는 악령들도 얼마든지 행할 수 있으므로 거기에다 어떤 비중도 두지 말고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만 판단하여 진리를 찾을 때라는 것이다. 바로 이를 위하여 3위1체의 법칙, 3운법칙 등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필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시종일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을 수 없다, 무턱대고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에 납득시킬 수 없다고 믿고 성경을 파고들기 시작했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절대 허튼 소리를 할 리가 없으니 예컨대 "자기 부인"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기에 이를 강조하셨는지 그 이치를 캐기 위해 딴에는 찾고 구하고 두드린 것이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불합리한 데가 없다는 결론에 "이상 무"라는 신호를 세계 모든 독자에게 알리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이 그와 같이 진실된 기록임이 자체 증명이 된 이상 성경적 사실만 기준 삼아 모든 것을 판단하면 되는 것이며 성경보다 더한 기적이 등장하여 온 세상이 적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의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조금도 이에 동요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이미 그 진실성이 자체 증명된 성경에 그러한 모든 소위 "기적"과 "최첨단 (자연과학)지식"들이 상충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첨단 (자연)과학이라도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그 관찰과 결론에서 착오를 일으킬 수도 있고 더군다나 이 세상 신(神)이 고의적으로(악의적으로) 인간을 조종할 수 있다는 점을 착안한다면 성경과 상치되는 것을 얼마든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둘 중 하나를 택할 기로에서, 거짓으로도 초능력을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다고 성경이 미리 경고하고 있는 마당에 성경의 진실성이 자체 증명되고 있다는 믿음이 철석 같은데, 그런 초능력에 흔들릴 리가 만무하다. '판단 기준'이 이래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온갖 거짓과 속임수를 이로써 간단히 처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아무리 내 고통을 치유해 준다고 해도 진실과 진리(성경)에 위배되는 것에 나아가서 내 영혼을 팔 수는 없지 않은가. 영원한 멸망을 자초하는 일을 일시적인 고통 면하는 일과 맞바꾸는 그런 천하의 바보 짓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차라리 죽으면 죽는 것이지 고통을 받으면 받는 것이지 영생을 영멸과 맞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믿는 형제들일진대 그럴 경우 함께 모여 합심 기도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마귀의 등쌀에 전혀 능력을 나타내주시지 않는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이나 어제나 영원히 동일하신 것이다(히 13:8).

그러므로 "스스로를 구원하라"는 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인간 스스로 모든 일의 주역(主役)됨을 증명하는 것이니, 구원에 양면성과 동시성에서 그리고 사랑의 동시성과 양면성에서 그 주인, 주체로서의 역할을 다하라는 것이요, 절대로 남의 덕을 보자는 의타심, 의뢰심을 스스로 조장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하나님께 의뢰하고 의지하는 것도, 진리대로 이행하는 측면에서의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동시성과 양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기대는 그런 피동성, 소극적인 자세를 하나님은 배격하신다.


그것은 결단코 사랑일 수가 없는 까닭이다. 하나님은 한 몸 체제에서의 필수 불가결한 요건으로서의 사랑을 요구하심이니 이를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도 나타났듯이 사탄의 시험은 이 양면성에서 어느 한 쪽을 허물어도 그로서는 승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인 것은 당장 눈 앞에 나타나 있는 현실로서의 세상이므로,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 사랑하기 위해 행하는 일체의 것이 사탄에게 절하는 것 즉 자아중심을 따르는 것으로서 우리의 마땅한 경계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모든 잘못된 개념들을 때 늦기 전에 바로잡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매사 행하기를 힘써 이 악한 날에 대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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